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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에서/이런저런 생각

육식을 위한 변명 - 『동물 홀로코스트』 감상문

by [헤이든] 2015. 4. 27.

 

 “왜, 알고도 침묵하는가.” – 찰스 패터슨(Charles Patterson)의 저서 『동물 홀로코스트』 (원제 : Eternal Treblinka)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옥철이라는 서울 지하철 9호선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한 트럭 화물칸에 실려 도살장으로 향하는 가축들을 도로에서 이따금씩 목격합니다. 또한 군 복무 시절에는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한 방역 작업에 동원되었고, 인근에서 살(殺) 처분이 집행되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서는 축산물 도매시장, 즉 도축장이 영업중입니다. 도축 작업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도축장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퀴퀴한 냄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수한 생명이 열악한 환경에서 강압적으로 길러지고, 제 명을 다하지 못한 채 살해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니, 무엇인가 말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축사와 도축장에서 희생되고 있는 생명에는 무관심 했고, 동물권(動物權)은 아예 인지 범위 밖에 있는 개념이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저에게 육식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 온 너무나 당연한 식습관이고, 반려 동물을 기르지 않기 때문에 동물과 모종의 교감을 할 기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로 접해온 동물, 특히 가축의 모습은 붉은 형광등이 달린 냉장고 속의 상품화된 고깃덩어리입니다. 즉 일상생활에서 동물과 물리적으로 분리된 채 살아왔습니다. 이는 패터슨이 “동물에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잔인함을 정당화”시키는 데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다고 지적한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개념적) 구분과 함께, 저를 동물권에 대해 침묵하게 또는 생각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동물 홀로코스트』는 동물권에 대한 인지로 접근할 수 있는 시발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저는 육식을 위해 동물에 가하는 폭력이 이제는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인간에 대한 폭력의 원형일 수 있다는 서술에 주목했습니다. ▲동물의 생식을 통제하는 가축화를 모방한 여성의 성적 종속, ▲거세된 채 사육되는 동물처럼 노역에 종사해야 했던 남성, ▲노예 생식 수단으로 여겨졌던 여성, ▲소유권을 표기하기 위해 가축과 노예에게 새겨졌던 낙인, ▲가축의 육종(育種)에서 영감을 받은 우생학, ▲우생학으로부터 파생된 제노사이드(genocide), ▲죽음의 수용소에 학살 기술과 핵심 요원을 (고의는 아니었더라도) 제공한 축산업. 이상의 정황들은 인간에 대한 폭력이 동물에 대한 폭력, “가축화가 확장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도덕감정론』에서 펼친 그의 공감 이론에 따르면 “상상을 통해 고통을 받는 자와 입장을 바꿔봄으로써, 우리는 고통을 받는 자가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만약 감정 당사자와 관찰자(觀察者)가 정서적으로 가깝다면, 보다 더 원활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사자와 관찰자의 감정이 일치할 때 공감이 이루어지고, 그 감정이 유발한 당사자의 행위의 효과가 일반규칙에 비추어 봤을 때 해롭지 않은 한 관찰자는 감정 당사자의 행위가 적정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여기 도축될 운명에 처한 가축, 또는 그들의 고통에 오롯이 공감하는 동물권 운동가가 있다고 합시다. 이들은 육종과 도축이라는 폭력에서 상당한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나아가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을 전 사회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들의 행위가 적정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동물 홀로코스트>를 읽고 동물∙동물권 운동가와의 정서적 거리감은 축소됐지만, 여전히 저는 그들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식에 대한 욕망이 동물과의 공감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공감하지 못한 탓에, 육식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행위가 적정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혹자는 육식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많은 단백질과 지방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식물로도 충분히 섭취가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준에서 소비를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 소비생활의 기본적인 경향이자 원리는 자신이 가진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효용 수준을 극대화 시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에서는 더 많이 소비할수록 효용 수준이 높아진다고 말합니다. 필요가 충족되었다고 해서 추가적으로 욕구하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 때 필요량과 그를 넘어서 추가적으로 소비하기를 욕망하는 양의 경계는 희미해집니다. 게다가 하나의 상품(채식)을 소비하는 것 보다는 다양한 상품(육식과 채식)을 적절히 조합하여 소비하는 편이 소비자의 효용 극대화를 위해서는 유리한 선택입니다. 단적으로 육류가 제공하는 맛과 식감에 대한 수요는 채식을 통해 충족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채식으로도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는 분석이라기 보다, 대부분의 인간이 육식을 욕망한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인간 소비생활의 원리, 인간의 육식욕만으로 육식 문화를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육식이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전제가 필요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동물 홀로코스트>가 인간의 육식 문화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인간에 대한 폭력의 원형일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폭력 행위는 단연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하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 대해서 부도덕하다고 가치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약한 종이 강한 종의 먹이가 되는 것은 자연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인간의 육식은 자연스러운 문화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육식은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져 왔으며, 이미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목축을 시작한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현대의 축산업은 선사시대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구의 증가와 사회적 분업, 그리고 생산양식의 변화에 따라 대규모 축산업이 발전한 데 따른 결과입니다.


 일각에서는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본인이 기른 동물을 직접 도축하여 육류를 소비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공장식 축사 보다 좋은 환경에서 길러진 가축이기 때문에 육류를 섭취하는 인간의 건강에도 좋고, 동물의 삶을 존중할 수 있는 도축 방식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동물 존중의 신념에 기반을 두고 충분히 행할 수 있는 공장식 축산의 대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회 전반의 시스템으로 구축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릅니다. 육류의 생산 비용이 크게 올라 육식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하게 떨어질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 매우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됨으로써 인류 문화 발전에 상당한 제약이 될 수 있습니다.


 동물 해방은 인류 문화의 현단계에서 구현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노예 해방 역시 자본주의로 생산양식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위해 노동력이 토지로부터 방출될 필요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제도와 문화가 바뀌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물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설령 육식에 대해 도덕적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아직은 유연한 태도를 취해야 할 때입니다..

 

 

 

■ 참고문헌

 - Charles Patterson, 정의길 역, 『동물 홀로코스트』, 휴, 2014

 - Adam Smith, 박세일∙민경국 역, 『도덕감정론』, 비봉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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