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의 반의어는 부끄러움입니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했던 요조는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요조의 탓만은 아니었죠. 하녀와 머슴으로부터 추악한 일을 당했지만, 요조는 그저 참았습니다. 사건을 알린다 해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라 지레 생각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소극성은 줄지어 앉아 독상에서 식사를 하는 숨막히는 집안 분위기에서 형성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거운 분위기를 장악한 아버지는 요조에게 너무도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요조는 오바 집안의 말석에 앉는 구성원이어야 할 뿐, 요조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익살 뒤편으로 스스로를 감췄습니다.
인간의 조건은 존중입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알아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악행을 저지른 이에게 “인간도 아니다”라며 비난합니다. 그리고 선행을 권유하는 말로 “먼저 인간이 되어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착함만으로는 인간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착한 행동은 다수의 타인이 기대하는 행동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의 요조는 본 모습을 감춘 착한 아이였습니다. 아버지와, 선생님과, 친구들이 기대하는 익살을 연출했습니다. 착한 요조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못했고, 스스로를 ‘도깨비’로 묘사했습니다. 정신병동에 입원하기 훨씬 이전부터 요조는 “인간 실격”감이었습니다. 단지 어린 나이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평결하는 장에 기소되는 일이 유예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인간 실격이 요조의 탓만은 아닙니다. 결코 평온하지 못했던 가정 환경은 요조에게 그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색과 약, 술에 빠져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실격의 책임을 요조에게만 돌리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오바 집안 막내의 모습을 강요했던 요조의 아버지, 추악한 일을 저지른 하녀와 머슴에게도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요조를 뒤흔든 호리키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잊게 해준다는 핑계로 나쁜 유혹에 휘둘려 자학한 요조에게도 책임이 있음은 물론입니다.
요시코처럼 다른 사람을 마음 속으로부터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믿음은 인간을 만듭니다. 요조 생애 딱 한 번, 인간됨을 꿈꾸었던 요시코와의 시간이 방증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간됨을 평가하는 자리에 있기 보다는 그 사람과의 상호 작용으로 인간됨을 만들어 가는 자리에 더 가깝습니다. 믿으면 존중하게 되고, 존중하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가급적 선의로 믿어 해석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할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광장에서 > 이런저런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모의 인생론 - 『자기 앞의 생』 감상 (0) | 2018.12.28 |
---|---|
참을 수 없는 쿨함의 무책임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감상 (0) | 2018.11.26 |
트레버에게서 읽는 관계론 - 『그의 옛 연인』 감상 (0) | 2018.10.08 |
길을 닦는 실력있는 사회 - 『아픔이 길이 되려면』 감상 (0) | 2018.10.08 |
『에콜로지카』에 드러난 진보진영의 약점 (0) | 2018.10.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