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장에서/이런저런 생각

녹색정치 공부 모임 - 성장에 대한 성찰

[헤이든] 2018. 9. 19. 18:51

[일러두기]

녹색정치 공부 모임의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개인적 의견이며, 어떠한 집단·단체의 입장도 대표하지 않습니다.


1. 내가 생각하는 발전/개발 담론

 경제는 성장해야만 합니다.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경제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투자입니다. 투자 규모에 따라 경제는 호황을 맞이하기도 하고, 불황을 겪기도 합니다. 경제가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입니다. 투자가 고용을 유발하고, 고용은 소득을 창출하여 구매력을 향상시키고, 우리는 소비 활동을 통해 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투자가 멈추고 고용이 위축되며, 소득이 일시적으로 정체하다 이내 하락세를 걷게 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투자는 앞으로의 성장을 전제로 하는 선제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풍요를 위한 성장이 아니라면, 빈곤으로 향하는 쇠퇴 뿐입니다.

 성장 일변도의 길을 걷자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종과 함께 일어나 마을을 가꾸며 압축 성장했던 우리의 현대사에서 그 부작용을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사회의 복리(福利) 증진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구성원 사이의 연대 등 비물질적인 활동에서 오는 정서적 만족 역시 무겁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복리는 정서적 행복(福)과 물질적 이익(利)의 합이기 때문입니다.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나누어질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고, 인류를 넘어선 생태계까지 고려하는 사회적 의사결정 역시 복리 증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정서적 만족을 위한 선택과, 물질적 풍요를 위한 선택 엇갈립니다.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지만, 단 ‘1g’만큼만이라도 무거운 것이 어느 쪽인지 판단해야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굳이 거창한 이론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아마도 많은 이들이 정서가 물질에 의존한다는 데 어렴풋이나마 동의할 것입니다.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으면, 더 높은 정서적 지향으로 나아가기 힘듭니다. 여유가 없기 때문이죠. 물질적 풍요가 정서적 만족 보다 적어도 ‘1g’ 이상은 더 무겁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발전은 복리 증진의 과정입니다. 물질적 풍요를 이룰 수 있도록 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생태계 모두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발전의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발전에서 소외된 곳에는 개발의 손길을 건네야 합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장하는 가운데’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내가 생각하는 탈성장사회

 탈성장사회라고 하더라도, “성장해야만 한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상은 지금보다 쇠퇴한 모습이 아니라, 분배를 통해 성장이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논제에서도 언급했지만, 성장하지 않는다면 투자와 고용이 위축되고 소득이 이내 감소합니다. 분배는 소득을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즉 탈성장사회도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고 그 과실을 분배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에 있어서는 ‘성장사회’와 탈성장사회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배에 대한 의지의 적극성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성장사회는 분배를 낙수효과에 맹목적으로 기댑니다. 생산 효율이 뛰어난 소수 대기업의 영리활동을 우선하여 적극 장려합니다. 영업실적이 뛰어난 대기업은 ‘협력업체’로부터 구매를 늘릴 것이고, 성장의 과실은 도급-하도급 관계를 타고 사회 전반으로 내려간다는 논리입니다. 분배를 위한 정책 당국의 인위적인 노력은 없거나 부족합니다. 언뜻 무위(無爲)의 위(爲)라는 도가철학 이상의 실현인 듯 하나, 지금과 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더욱이나 낙수효과가 실효를 거두기 힘듭니다. 원사업자는 더 많은 구매를 하기 보다, 더 적은 원료를 더 적은 값에 구매함으로써 효율을 꾀합니다.

 탈성장사회에서는 강력한 분배제도를 구축해야 합니다. 허울 좋은 조세특례제도는 일몰시키고, 누진세는 확대하고, 불필요하게 과도한 세출은 줄이고, 증여 및 상속과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론적으로는.

 현실적으로 강력한 탈성장 정책의 추진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국제 사회는 국민국가 단위로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분배를 강조하는 국가에서 성장을 강조하는 국가로 아주 쉽게 떠날 수 있습니다.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분배 강화책은 오히려 분배해야 할 파이를 줄여버릴 수 있습니다. 이민자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분배 대상이 늘어나게 되면 동일한 크기의 파이라도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탈성장사회는 성장 일변도로부터도 벗어나야 하지만, 국민국가 단위의 경쟁 체제로부터도 탈피할 때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 네트워크와 국제적 정책 연대가 필요합니다. 녹색당이 그 중심적 역할을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3. 내 삶의 발전/개발 이데올로기

 소비는 만족감을 줍니다. 소비는 단순히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어진 소득 안에서 최대한의 만족을 누리기 위해 소비합니다. 필요와 그 이상을 구분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보건복지부에서 발간한 <한국인 영양소 섭취기준>에 따르면 30세 남성에게는 1일 2,600kcal의 에너지 섭취가 필요합니다. 하루에 BHC의 뿌링클 치킨 한 마리만 먹어도 필요는 충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먹죠. 일용할 양식으로 피자 한 판은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맛있어서 먹고, 허전함을 달래려 먹고, 삼시세끼라는 습관 따라 먹습니다. 그런데 음식 보다 더 많은 경우에, 필요 소비량과 그 이상의 경계는 불분명 해집니다.

 도시생활에 대한 소비는 제게 가장 큰 만족감을 제공합니다. 잘 정돈된 도로, 충분한 양이 공급되는 수도와 전기, 촘촘한 대중교통망, 깔끔한 카페, 곳곳의 문화시설, 쾌적한 쇼핑몰, 그리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 혼자일 수 있는 익명성까지. 명시적인 비용을 지불하지 않더라도, 도시에 거주함으로써 소비하게 되는 도시의 혜택은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그 도시생활에서 필요량과 그 이상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인구 58만의 위성도시 안양 정도면 적정 수준의 도시생활을 제공하고, 천만의 말씀을 듣는다는 서울은 지나친걸까요?

 적정 수준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인구는 도시로 밀집되고 도시는 팽창했습니다. 이와 같은 도시생활에 대한 소비 증가는 기반시설 건설과 유지보수의 효율을 증대 시켰습니다. 그리고 도시에 거대 시장을 형성함으로써, 물질적 풍요를 이루게 했습니다. 도시는 현대 발전국가의 가장 보편적인 삶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반면 도시 개발은 파괴적인 면도 컸습니다. 택지개발을 위해 녹지를 파헤쳐야 했고, 철거민의 주거권 침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에너지 생산지인 지방으로부터 소비지인 대도시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고압송전탑을 곳곳에 설치해야 했습니다. 청·장년 인구가 유출되면서 활력도, 미래도 잃은 지방(도시)은 살생부에 오르게 됐습니다.

 파괴하지 않는 도시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녹색정치로 도시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요? 가능해야 합니다. 도시에서 녹색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성 있고 구체적인 방안이 무엇일까는 녹색당의 과제가 될 것입니다. 현실정치에서 설득의 대상이 되는 시민은 저와 같이 도시생활이라는 소비를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