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 넓고 얕게 - 독서 모임 1회차 [역사]
서울 강동구에 소재한 생각실험 협동조합에서 주최하는 <지적 대화 넓고 얕게> 1회차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활동지의 저작권을 존중하여, 질문은 생략한 채 제 생각만 남깁니다.
1.
지적 대화는 [ 젊음 ] 입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점점 궁금한 것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경험이 쌓인 만큼 익숙한 것이 많아지고,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에 기대다보면 새로운 자극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지적 대화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합니다. 즉 지적 대화는 우리를 나이들지 않게 하는 젊음입니다.
2.
뉴스 뿐만이 아니라 지근거리에서도 소통하기 어려운 사자를 많이 마주합니다. 물론 저도 다른 누군가에게 사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사자의 말을 하느냐, 사람의 말을 하느냐는 살아온 배경만큼이나 개인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기꺼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거나, 이해해야 할 필요를 느낄 때 그 사람을 사자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사자의 탈을 벗습니다. 그러나 소통의 의지가 없는 곳은 사자의 서식지가 됩니다. 이를테면 직장에서의 업무 외적인 식사자리에서 사자를 마주하게 되고, 저 역시 사자의 말을 합니다.
3.
'나'를 이해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대한 견문과 통찰이 곧 내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이해에 너무 많은 무게를 둔다면, 언젠가 정작 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음에 공허함을 느낄 것입니다.
상황을 구체화하여, 회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동자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아는대로라면 다른 노동자들과 단결하여 행동하고, 회사 측과 교섭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에 따르는 위험과 스트레스도 감수해야 합니다. 싸울 것인지, 적당히 타협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세상 보다는 나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나보다 세상을 먼저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대화의 공통분모는 나라는 개인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될 확률이 현저히 높기 때문입니다.
4.
직선적 시간관을 갖고 있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는 종교의 세계관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이 직선적이냐 원형적이냐에 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아니면 양상만 달라질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역사가 반복되는가.
역시나 논쟁적인 견해겠지만, 역사는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보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능숙하게 환경을 통제하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스스로를 사축이라고 냉소하며, 봉건사회 농노의 불행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가볍게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와 함께 행복의 기대치가 달라졌을뿐입니다. 부침은 있지만 긴 호흡에서 바라보면, 역사는 우상향의 직선을 그리며 진보하고 있습니다.
5.
먼저 신에 대해 정의 내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인격신을 가정한다면, "신은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다"라고 믿습니다. 어떤 존재로서의 신이 수행하는 역할이 있다 또는 없다라는 생각에 대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믿는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신을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바라본다면, 신은 현실세계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자연법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신에 의한 현실을 탐구하는 일에 과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의심이 있다면, 제 생각이 유신론자 그리고 무신론자 모두와 더불어 살기 위핸 사회적 타협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6.
국가는 권위를 얻어 합법적인 강제력을 동원하는 주체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생각합니다. 큰 규모의 사회에서 대다수가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한, 정치는 엘리트의 영역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 규모가 커질수록 그 구성원의 권리는 희석되고,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탓에 거시적 안목을 갖는 데는 한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어느 사회나 권위를 부여 받아야 합니다. 그 권위의 원천이 신 또는 혈통 따위라면 전근대적 국가가 될 것입니다. 한편 보편적 시민으로부터ㅡ이 위임에 의해 권위가 인정된다면 민주국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컨대 국가는 엘리트의 통치 도구입니다.
7.
경제가 역사를 움직여온 핵심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오히려 다른 시각을 생각해보기 어렵다는 편에 가깝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생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경제활동의 근원적인 질문이자, 곧 인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수렵 및 채집의 원시사회로부터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사회 그리고 그 너머에 이르기까지. 제도와 문화 등은 경제적인 조건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 왔습니다.
어떤 관념이 추동하여 구체적인 물적 조건에 변화가 일어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물적인 하부구조가 관념적인 상부구조에 주는 영향이 더 큽니다. 새로운 관념이 출현하거나 변화를 겪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상상의 능력은 경제적 조건에 의해 제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참고문헌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한빛비즈, 2014